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쿄 대공습 (문단 편집) === 조선 === 일단 앞서 서술하였듯이 조선인 사망자 역시 1만 명 가량에 이른다. 3년 간의 한국전쟁으로 인한 대한민국 측 민간인 희생이 약 37만 명인 것과 비교하면 이틀 만에 엄청난 사람이 죽은 것이지만, 국내에서는 대체로 남의 일로만 여겨지고 있다. 물론 이를 부각하면 일본의 피해자 행세에 악용될 여지도 있겠으나, 자의 반 타의 반 거기까지 일하러 갔다가 죽은 조선인들의 존재를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도쿄 대공습 같은 대규모 폭격 시 목조주택이 많은 일본 대도시 특성상 일부 지역의 폭격만으로도 화재가 도시 전체로 번지는 일이 많았다. 따라서 폭격을 당해도 해당 지역만 화재가 일어나고 화재가 도시 전체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도시 내부에 마치 도로처럼 줄 모양으로 특정 지역을 비워놓는 소개지역을 대규모로 만들었다. 이는 일본 열도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의 식민지배하에 있었던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서울특별시|경성부]](京城府) 중심가에도 이러한 지역이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곳이 현재 종묘 앞에서 퇴계로까지 남북 구간과 광희동 사거리에서 4호선을 따라 [[서울역]]까지 동서 구간이다. 이 남북 구간은 해방 후 그냥 빈 땅으로 남았다가 월남자와 전쟁 피난민들이 움막을 치고 살거나 노점을 했으며 사창가 '종삼'이 들어서기도 했다. 훗날 이 지역을 [[일제강점기]] 당시 계획대로 화재가 번지지 않게 만든 방재구간으로서 빈 땅으로 둘 것인가, 건물을 세워 [[재개발]]할 것인가 의견이 맞서다가 결국 두 가지 다 하기로 결정하여 [[세운상가]]로 개발되었다. 현재의 종로 세운상가에서부터 진양상가가 들어선 곳이다. 동서 구간은 해방 이후 도로포장을 하여 도로로 사용했는데 이것이 오늘의 [[퇴계로(서울)|퇴계로]]다. 일제강점기 당시 태평양전쟁 전의 경성부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퇴계로에 해당되는 도로는 없었다. 대신 오늘날 충무로라고 부르는 도로는 있었다. 왕복 6차로인 퇴계로 한 블럭 뒤에 있는 왕복 2차로짜리 도로이다. 대공습 당시 조선인들은 이 처참한 소식[* 당장 조선인 사망자 역시 1만에 육박한다.]을 듣고 "우리도 폭격을 당할지 모른다."고 걱정하기도 했으나 조금이라도 국제정세를 아는 사람들은 "미국은 절대로 조선을 폭격하지 않는다."고 안심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승전국으로 반환이 예정되어 있던 [[타이베이시|타이베이]]도 일본 본토의 도시들처럼 전략 폭격을 당한 사실을 감안하면 이 같은 설명이 충분히 신빙성이 높다고 볼 수 있는지, 그리고 당대 사람들이 이 설명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었을지는 의문스럽다.] 이미 폭격 2년 전에 루즈벨트 대통령과 연합국의 수장들이 협의한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은 일본의 일부가 아니므로 종전 후 독립시킨다."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대규모 폭격을 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한국에 대한 공습이 아주 없지는 않아서 제주도, 함흥, 원산, 부산, 대구 등지에 소규모의 폭격이 있었다. 하지만 도쿄 대공습과 같은 민간인 주거시설과 산업 및 군사시설 가릴거 없이 무작위로 폭격 하는 초토화 공습이 아닌 함재기를 동원한 산업 및 군사시설, 철도역 등에 대한 정밀폭격이나 제주도, 목포, 신의주 등 항만과 인근 해상을 목표로 화객선에 대한 통상파괴작전이나 소규모의 기뢰 살포 작전이 주를 이루어 민간인 피해는 매우 적었으며 폭격 빈도나 규모도 일본 본토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또한 중국을 기지로 한 폭격기 편대가 일본 본토로 향할 때 한반도 상공을 통과하면서 조선 시내에 사이렌이 올리고 일본군의 대공포나 항공대가 폭격기대를 추격한 사례도 있으나 폭격기 편대가 조선을 상대로 공습을 벌이거나 격추된 사례는 전무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